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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훈 (OlO-9440-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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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동 아빠방(호빠) OlO.9440.0540 K대 법대 출신 성훈 실장 |
아무래도 좋은 일 - Part 4
토토코 씨가 돌아간 뒤 텔레비전을 틀었더니 10만 엔짜리 참치니, 1만 엔짜리 카레니 하는 음식이 나온다.
1만 엔짜리 카레니 시세이도 파라(시세이도가 운영하는 음식체인점)에서 판다고 한다.
나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텔레비전에서는 예능 프로만 나온다. 뚱뚱한 몸이 무기인 개그맨이 둘이나 나왔다. 불쾌했다.
초등학교 교사인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친구의 동료 선생이 사회 수업 중에 미국인은 비만 때문에 수명이 짧은 데 특히 소아 비만이 심각하다. 그런데 아프리카는 기아 때문에 평균수명이 짧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한 학생이 대답했다.
"뚱뚱한 미국 애를 아프리카 애한테 먹이면 되잖아요."
그 선생은 쇼크가 컸을 테지. 나도 몹시 충격받았다. 지금까지도 섬뜩하다. 기분 나쁜 이야기다. 세상은 무서운 곳이다.
문득 혼자 설음식을 만들어서 어쩔 셈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만들어야 한다고 여겼을 뿐. 아, 관두자.
오우메카이도는 해 질 녘이었다. 거리에는 인기척이 드물었다. 인기척이 드물어 섣달그믐답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쓸쓸하기도 했다.
가도마쓰(새해에 문에 거는 소나무 장식)랑 수선화, 백량금을 샀는데 팔고 남은 물건이라 볼품없는 데다 비쌌다. 볼품없는 수선화를 보니 내가 꽃 중에 수선화를 가장 좋아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밖에 없다고 하니 싱싱한 수선화를 양팔 가득 안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사람은 가지지 못한 것에 욕심을 냈다. 꽃을 싼 포장지가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며 말려 올라갔다.
비디오 대여점 앞 신호등에서 비디오나 잔뜩 빌려 태평한 섣달그믐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홍백 가요 대전>에는 내가 모르는 젊은 애들만 나온다. 모르는 노래뿐이다.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기를 기다리며 가게 출입구를 살펴보니 젊은이들이 들락거린다.
저 애들은 섣달그믐인데도 비디오나 볼 수밖에 없는 외로운 젊은이들인가. 가족이 없는 건가. 애인도 없는 건가. 부디 애인이랑 함께 보기를. 하지만 애인도 가족과 함께 새해맞이 메밀국수를 먹는 편이 좋지 않을까. 어쩌면 섣달그믐도 가족도 해체되어가는지도 모른다. 생판 모르는 남들이 비디오 빌리는 풍경에 대고 오지랖 넓게 걱정하는 내 모습을 남들이 비디오 빌리는 풍경에 대고 오지랖 넓게 걱정하는 내 모습을 타인의 눈으로 본다면 어떨까. 멀쩡한 할머니가 섣달그믐에 비디오를 대여섯 개씩 빌린다면 불쌍한 할머니. 황량한 풍경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남들 눈에 그렇게 보이는 건 싫다.
나는 체면 때문에 비디오 대여점 방문을 포기했다. 가게의 회색 비닐봉지 한가득 비디오를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오우메카이도를 지나가는 섣달그믐의 내 모습이, 꼭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상상되었다.
나의 체면이란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인가. 흠, 하지만 체면도 세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세간이 되지 않으려고 평생토록 무던히 애써왔따. 하지만 내 안에도 세간이 잠복해 있었떤 것이다. 곤란하다. 내 의지는 세간에 졌다. 나는 머리를 푹 숙이고 골목길을 걸었다.
나는 노인이 된 이래 적어도 자세만은 똑바로 걸으려고 언제나 신경 썼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딱 마주친 지인이 말했다. "뭘 그리 거만하게 으스대며 걷는거야." 세간은 어렵다.
현관에 걸어둔 싸구려 가도마쓰가 볼품없이 흔들거렸다.
새해맞이 메밀국수 대신 체인점에서 사 온 라면을 <홍백 가요 대전>을 보면서 먹었다. 라면에 고수를 넣었다. 나는 어째서 이다지도 고수를 좋아하는 것일까. 작은 출장에 놓인 조그만 가가미모치(둥근 떡을 만드는 새해 장식)와 수선화가 보였다. 귀엽다. <홍백 가요 대전>에는 본 적도 없는 젊은 애들만 나오는 통에 나는 주변을 걸레로 닦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시청과 걸레질을 교대로 하다 보니 집 안이 완전히 말끔해졌다. 맨날 섣달그믐이라면 집이 항상 깨끗할 것 같다. 사노 신이치의 '정상에 선 녀석 - 보인도 몰랐던 이시하라 신타로'를 읽으며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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