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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훈 (OlO-9440-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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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안동 아빠방(호빠) OlO.9440.0540 K대 법대 출신 성훈 실장 |
사는게 뭔지 - 3
랩에 싼 양파가 반 개 남아 있어서 그것도 썰었다. 그러자 볼에 채소가 한가득 쌓였다. 아직 여주도 반 개 남아 있다. 여주도 썰었다. 전부 섞었다. 몇 번이고 양손으로 섞어 풍성하게 만들었다. 찾아보니 절반 남은 샐러리도 있었다. 이제 어쩐담. 나는 마늘을 빻아 빈 식초병에 넣고 드레싱을 만들었다. 섞은 채소를 그릇에 담고 드레싱을 뿌려 먹었다. 여자 맛이 어떨지 걱정이었지만 의외로 대성공이었다. 입안 가득 쓴맛이 입속을 자극해서 침이 나오니 식욕이 왕성해진다. 양배추 따위는 아무 맛도 안 난다. 남은 채소를 커다란 통에 다아 냉장고에 보관했다. 반 남은 사과도 잘라서 함께 넣었다.
밤에 <프로젝트 X>(힘든 과정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NHK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울었다. 저런 훌륭한 사람들이 다 있나. 오늘의 프로젝트는 사력을 다해 만국박람회를 경비하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저 아무개 도모로요(다쿠치 도모로요 <프로젝트 x>의 내레이션을 담당한 배우)라는 사람의 목소리로 "그때 XX는 말했다. 좋아. 해보자고! OO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는 내레이션이 흐르면, 설령 프로젝트가 군고구마 장사라 해도 눈물이 날지경이다. 모처럼 시청자를 감동시키려고 만든 방송이니만큼 우는 게 이득이겠지.
울어서 배가 꺼졌다. 통에 넣어둔 믹스 채소를 그릇에 덜고 드레싱을 뿌려 먹었다. 이로써 오늘 분량의 채소는 충분히 섭취한 것 같다. 그래도 믹스 채소를 전부 다 먹으려면 하루하고도 반나절, 다섯 번은 더 먹어야 한다.
옷장을 뒤져보니 가죽 장갑이 한 짝밖에 없다. 한 짝밖에 없는 장갑만큼 찝찝한 것은 없다. 찝찌반 채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무코다 구니코는 한 짝에 없는 장갑으로 상당히 요염한 이야기를 썼다. 하지만 내 장갑이 없어진 것과 요염함 따위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냥 사라졌을 뿐이다. 그냥 사라지다니 그것도 대단하다. 어쩌면 작년에 코트 속에 넣어둔 걸 깜빡했을지도 몰라서 코트 주머니를 전부 뒤졌다. 구깃구깃한 손수건 한 장에 두 번 접은 1천 엔짜리 지폐 두 장이 나왔다. 2천 엔이 나왔는데도 기쁘지 않다.
별안간 산 지 일주일 정도 된, 회색과 검은색 줄무늬 머플러도 안 보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장갑을 찾는 중인데 어째서 머플러 생각이 난 건지 모르겠다. 짧은 머리카락이 사방팔방으로 쭈뼛거렸다. 없어지고 나니까 장갑을 꼈을 때 손에 착 감기는 부드러운 감촉이 양 손에서 몇 번이나 되살아났다. 목 언저리에서 따스했던 머플러의 느낌도, 특히 턱 밑의 포근한 감촉이 생생했다. 철컥철컥 옷 장 서랍을 몇 번이나 여닫았다. 그러자 서랍 속이 엉망진창이 되어서 우울해졌다. 신경은 곤두서 있는데 가슴은 꺼질 듯 먹먹했다. 천재지변이라도 덮친 것 같다. 재앙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한 참을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주저앉아 있어봤짜 방법이 없어서 소파로 가서 나자빠졌다.
그러자 베네치아의 거리가 눈앞에 떠올랐다.
베네치아의 거리가 눈 앞에 떠오르자 영화 <여름의 폭풍(Senso)>의 알리다 발리가 사랑에 미쳐 베네치아를 돌아다니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재생되었따.
알리다 발리는 어둡고 좁은 골목길을 빙빙 돌고 있다. 이번에는 리도 섬 해안의 의자에 앉은, 머리카락에서 검은 땀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의 더트 보거트의 이마가 떠올랐다. 강한 햇빛이 내리쬐는 이쪽은 한낮이다.
그리고 내가 장갑을 산, 베네치아의 장갑 가게가 머릿속에 휙 나타났다가 휙 사라진다. 15년도 더 된 일이다. 장갑 가게 여주인은 일본인인 나를 깔보고 있었다. 싼 물건을 사도 비싼 물건을 사도 나를 대하는 태도는 나뻐질 것이 분명했다. 나는 눈 딱 감고 가장 고급스러운 물건을 사서는 도망치듯 가게를 나왔다.
함께 간 친구는 베네치아에서라면 <여정>의 로사노 브라지와 마주치지 않을까 하며 두리번거렸다. "넌 일본에서도 남잘 못 찾았으니깐 여기서 로사노 브라지랑 마주칠 리 없다고!" 나는 몇 번이나 외쳤다. 그 애는 시끄럽고 거추장스러웠다.
나는 나름대로 그 장갑을 몹시 아꼈다. 소중히 다루면서 손에 낄 때는 반드시 가게 여주인의 코웃음을 떠올렸다. 장갑이 없어지면 그 여주인의 코웃음도 기억에서 사라질까 했더니, 아쉼과는 별개로 여주인의 코웃음은 뇔에 계속 남아 있었다.
내일은 곧바로 장갑을 사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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