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좋은 일 - Part 3

 

장안동 아빠방(호빠) OlO.9440.0540 K대 법대 출신 성훈 실장

아무래도 좋은 일 - Part 3

 긴톤이랑 다시말이 요리는 끝났다. 통에 나눠 담고 긴톤을 먹으면서 말했다. 
 "고구마 맛이 너무 많이 나나?" 
 "괜찮아, 됐어. 근데 좀 고구마 같긴 하네." 
 "괬어. 괜찮아. 근데 진짜 고구마 같네."
 "뭘, 됐어. 좀 고구마 같은 같은가?"
 "나랑 토토코 씨만 있다면 세상에는 발전이 없을 것이다.
 토토코 씨는 시장에서 산 생선과 긴톤. 다시마말이를 들고 중앙선을 타고 히노로 돌아갔다.
 토토코 씨가 집에 간 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린 시절 먹었떤 귤 우무가 너무도 선명한 색상으로, 비현실적일 정도로 또렷하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눈앞에 있는 귤보다도 생생하게 팟. 팟.
 아, 무섭다. 이건 혹시 내가 노인이 된 증거가 아닐까? 늙으면 어제 먹은 음식은 까먹어도 어릴 적 기억은 갈수록 선명해진다던데.
 자식을 키운 찬항때의 일도 이처럼 뚜렷이 떠오른 적은 없었다.
 언젠가 장남삼아 만든 소방차같이 새빨간 코트를 떠올려봐도 빛바랜 빨강으로빡에 기억나지 않는다. 귤을 파먹어서 들쭉날쭉 구멍이 난 우무, 투명하고 작은 파편의 흔들리는 모서리에서 반짝이던 빛. 우무는 범랑 통을 비집고 올라온 것처럼
 "괜찮아, 됐어. 근데 좀 고구마 같긴 하네." 
 "괬어. 괜찮아. 근데 진짜 고구마 같네."
 "뭘, 됐어. 좀 고구마 같은 같은가?"
 "나랑 토토코 씨만 있다면 세상에는 발전이 없을 것이다.
 토토코 씨는 시장에서 산 생선과 긴톤. 다시마말이를 들고 중앙선을 타고 히노로 돌아갔다.
 토토코 씨가 집에 간 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린 시절 먹었떤 귤 우무가 너무도 선명한 색상으로, 비현실적일 정도로 또렷하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눈앞에 있는 귤보다도 생생하게 팟. 팟.
 아, 무섭다. 이건 혹시 내가 노인이 된 증거가 아닐까? 늙으면 어제 먹은 음식은 까먹어도 어릴 적 기억은 갈수록 선명해진다던데.
 자식을 키운 찬항때의 일도 이처럼 뚜렷이 떠오른 적은 없었다.
 언젠가 장남삼아 만든 소방차같이 새빨간 코트를 떠올려봐도 빛바랜 빨강으로빡에 기억나지 않는다. 귤을 파먹어서 들쭉날쭉 구멍이 난 우무, 투명하고 작은 파편의 흔들리는 모서리에서 반짝이던 빛. 우무는 범랑 통을 비집고 올라온 것처럼 모서리에 딱 달라붙어 있었고, 거기서만 작은 거품이 일었다.

장안동 아빠방(호빠) OlO.9440.0540 K대 법대 출신 성훈 실장


 무서운 뇌. 혹시 나중에 생긴 뇌세포가 죽어 떨어져 나가면서 안쪽 뇌세포가 죽어 떨어져 나가면서 안쪽 뇌세포가 바깥으로 나온 게 아닐까.
 일본인은 누가 뭐래도 설날에 떡을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예전에 소타네 집에 가서 설날에 뭘 먹느냐고 물었더니
 "빵이랑 커피. 우린 명절 음식 같은 건 안 먹은 지 몇십 년이나 됐어"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들으니
 '일본이 앞으로 어찌 되려는지. 그러고도 네가 일본인이냐?'
 싶어서 언짢아졌다. 이런 일로 기분이 나뻐지는 내가 아니다. 다만 그래야 한다고 믿을 뿐이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 가족은 2년간 중국 다렌에서 굶주리며 생활했다.
 2년 내내 쌀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쌀 한 되가 500엔이었다. 500엔에 일본 아이를 사는 중국인도 있었다고 했지.
 붉은 수수죽도 귀한 음식이었다. 보릿겨라는 것도 먹었다. 보릿겨가 보리 껍질이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성긴 무명천을 덧댄 우리 집 문풍지 겉에는 보릿겨 가루 같은 갈색 반점이 있었다. 나는 문풍지 반점을 어디선가 따로 모아 파는 줄로만 알고 부모님이 사 왔다고 생각했다. 보릿겨 경단은 끔찍했다. 톱밥을 빚어서 찌는 법이 더 맛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시절에 설을 맞이했다.
 어이서 얻었는지 설날에 우리 가족은 떡국을 먹었다. 노랗고 둥근 조차떡이었다. 국을 뜬 순간 동그란 떡은 폴폴 풀어져서 그릇 바닥으로 가라앉았따.
 "뭐야. 이건." 
 아버지가 말하자. 엄마가
 "역시......"라고 답했다. 젓가락으로 그릇을 휙휙 휘저었더니 떡은 그대로 국물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걸쭉한 액체를 홀짝홀짝 마셨다.
 "역시......"
 은 대체 무슨 뜻어었을까. 그런 상황에서조차 일본인은 떡국을 먹고 싶어 하는 것이다. 먹고 싶었떤 게 아니라. 먹어야 한다고 믿었다.
 엄마는 어디서 무슨 수로 차조라는 음식을 손에 넣은 것일까. 그걸 손에 넣기 위해 무엇을 판 것일까.
 자식이 다섯이나 되었다. 갓난아이도 있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버지는 패전 후에도 아기를 만들었따. 아무리 계산해봐도 그 시기다. 어이가 없다.
 굶으면 굶을수록 인구가 늘어난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장안동 아빠방(호빠) OlO.9440.0540 K대 법대 출신 성훈 실장


 북한과 아프리카의 배만 불룩 튀어나온 갓난아이들이 텔레비전에 나온다. 그 장면을 보고 나는 어째서 아이를 낳으니냐고 묻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아버지가 옳았을지도 모른다. 일본으로 돌아오던 해에 네 살짜리 남동생이 죽었고. 그다음 해에는 오빠가 죽었따. 영양실조였을 것이다.
 다섯이 셋이 되니 식비가 줄어 다행이라는 생각은 안 든 모양이다.
 오빠가 죽은 이듬해 여름. 아버지는 엄마에게 또다시 자식을 낳게 했다.
 아, 생명이란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네 살짜리 남동생은 죽을 때까지 쌀 밥이라는 걸 먹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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